0.
오랜만에 즐겁게 읽은 소설이었다. 인물들 각각의 이야기와 관계성이 흥미로워 빠르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작가의 문체도 깔끔하고 흡입력이 좋아서, 군상극 형태를 지님에도 이해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던 것 같다.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여럿 존재하지만, 유독 이 소설이 돋보인 이유를 고민해보았는데, 시대를 특정 정서나 사상의 도구로 쓴 것이 아닌, 기구하게 얽힌 인물들의 삶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렇기에 국내 및 해외 독자들이 인물들의 정서와 선택을 이해하고 또 자문하며 당대의 고통과 아픔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 같다.
1-1.
(라)가 비교적 한국 문학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어’를 기반보다는 한국을 기반으로 한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 이 기반은 현대 한국인들이 공감할 정서가 될 수도 있고, 작가의 국적이 될 수도 있고, 한국의 역사가 짙게 드러나는 색채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넓은 정의는 한국 문학 규정의 모호함을 낳을 수는 있지만, 특정 정서 혹은 민족성에 매몰되어 오히려 범위를 한정한다면 문단계의 발전을 저해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1-2.
소설의 주향유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중세 시대의 지배 계층한테는 유학서 및 시조가 있었기에 소설은 가치가 저하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주 향유 집단인 평민들의 정서에 맞추어진 작품이 인기였을 것이다. 반면 근대에 있어 소설이라는 문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집단은 지식인과 자본가들이었기에 그들의 문화에 맞춘 정서의 인물들이 인기를 끈 것이라고 간주된다. 24년도에는 유독 마이너리티한 요인을 갖고 있는 주인공들 및 이야기들이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소재 면에서는 통상적인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전반적인 ‘사랑’의 형태를 논하는 이야기와 고립과 고통을 다루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1-3.
나는 시기 무관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은 둘 다 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제 시기에서 순수 문학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건 작가가 응당 감수할 부분이다. 이는 시대상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앞에서 미는 부가적일 수밖에 없는 이치에 기반한다고 본다. 문학 또한 단순 미적인 역할만을 맡을 수 있으나, 좁게는 자유부터 넓게는 당장의 생명까지 기본적인 나라와 개인의 안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탐미주의는 속좋은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으니 비판은 응당 붙을 수밖에 없다.
현재는 탐미 문학이 더 많아졌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 문학계가 ‘참여 문학’의 가치에 매몰되어 소설의 기본적인 요인인 넓은 독자층, 순수한 재미 등을 많이 잃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1.
성수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인위적 조성된 개념이라고 생각하나, 그와 달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후대에 전달해주는 건 단순히 유전자 뿐만이 아닌 살아온 삶의 방식을 비롯한 전통도 포함되어 있다. 현대에 그 맥이 사라진다고 해도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정서들이 전달 되어있고, 소설에서와 나오는 것 같은 원치 않은 통합은 이러한 핵심적인 맥을 끊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2-2.
‘이름뿐인 독립’이라 일컫을지라도, 동등하고 평등한 권한을 가진 인격체로 살아갈 배경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장의 가시적인 번영과 안녕의 인정은 결국 모든 식민지 및 독재 체제에 대한 인정이나 다름없다. 이를 현대로 확대하면 이러한 부조리에 대한 순응을 ‘실질’이란 말로 보기 좋게 포장하나, 결국은 굴종이라는 사실을 대다수가 망각한다는 생각이 간혹 든다.
3-1.
외적 동기로 움직이는 편이 많기에, 오히려 내적 동기로 움직이는 자들을 동경하는 편이다. 다만 내적 동기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말을 얹으려면 본인 또한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는 행위를 보여야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나는 노약자를 위해서 좌석을 양보해야한다는 입장이고, 이에 관해서는 나 또한 성실히 말을 지킨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양보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들이 싫다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
다만, 나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한 비판은 내놓을 수 있어도 어떤 사상이든 강요로 가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좌석 양보를 하지 않는 사람이 싫다고 내가 말할 수는 있어도, 그 행위를 당연시하고 강제시하는 것부터는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3-2.
나는 결국 진실된 사랑이라는 것도 특별하거나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그 순간에 충실함을 일컫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음식, 가수, 애니, 사랑 등 좋아하는 대상이나 사람이 생겼을 당시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이게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존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이 퇴색되거나 변모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변화가 내가 그 대상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결국 순간에 충실함이 가장 진실함에 근접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3-3.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한 충족이 우선시 되어야 진실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호와 한철 모두 경제적 요인이든 환경적 요인이든 사랑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다. 결국 이는 자신에 대한 일정한 부분이 충족되어있지 않기에 나타나는 면모이다. 사람은 절대 완벽하게 완성될 수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에 대한 갈망보다 특정한 결핍이 더 크게 느껴질 때는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에는 그게 애정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경제적 안정이 될 수도 있다.
나한테는 이러한 ‘나’를 만들 수 있는 독립운동 같은 행위가 곧 ‘여유’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부가적인 요소로 미룬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이 있는지에 대한 조건이다. 정말 바쁘거나 힘들어도 이러한 정신적 여유가 있다면, 사랑하는 데에 문제가 없으나, 어떠한 이유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배려할 여유조차 없다면 그때부터는 사랑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4-1.
고통이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극심한 생활고로 인한 신체적 굶주림 및 병증 등 고통을 느끼는 범위는 달랐으나 분명 그 고통의 범위가 크기에 죽음이 주는 평온함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된 원동력은 사실 미련이라 생각한다. 자살의 이유가 다시 생각하면 삶의 이유가 된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본다.
4-2.
사랑이란 단어가 우정,동경,의리 등과 완전히 구분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에 가장 근접한 설명은 ‘애틋함’이라고 본다. 사랑이란 감정을 단순히 과학적인 설명으로만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정 호르몬의 분비라고 한다면, 욕정과 다를 바가 없어지고 심장이나 몸의 움직임으로 정의내리면 공포와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러한 것들과 다르게 사랑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정서가 나에게는 애틋함이라고 생각된다.
5-1.
둘 중에서는 이토의 말에 더 동감하는 바이다. 다만 이는 옥희의 가치관이 문제라기보단,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토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타인이 삶의 이유가 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혼란과 절망에서도 스스로 가치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얄팍한 믿음 때문이다. 옥희의 질문을 깊게 파고들어 고립된 삶이 과연 내게 의미를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5-2,
규정하기 어려우나 옥희한테는 깊은 우정에서 피는 사랑이었겠지만, 타자의 입장에서는 남녀간의 사랑으로 보인다. 둘이 나눈 정서적 교감을 내가 섣불리 가늠하거나 정의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지만 단순하게 나는 상대의 짝사랑을 이유로 잠자리를 허용해준 시점부터 애초에 우정을 넘어선 관계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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