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결이란 단어의 불완전성. 가변세계. 이런 상대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꽤 오래 봤던 것 같다. 그러한 모호함을 좋아하기도 했고. 아마도 사회가 흑백논리와 극단성으로 기우는 데에 지쳐서 그랬던 것 같다. 근데 최근에는 명료성으로 다시 취향이 기울어간다. 내가 주된 이야기를 나누는 집단이 바뀌어서 그런 걸지도. 여전히 사회는 양끝만 소란하다. 하지만 비슷한 사람이 있는 곳에 오니 역으로 순환론적 문제에 빠져버리는 기분이다. 철학 수업에서도 다들 상대성에만 집중해 내는 의견이 비슷하고... 단조롭다. 수용은 생각의 깊이를 끌어올리지만, 동시에 좁은 굴로 파고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확장이 곧 고립이 된다. 상대성이란 단어로 모든 오류를 무마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상대성이 점차 싫증이 난다.
태도랑은 별개로, 오류라 덕지덕지 칠해진 자극적인 의견이 고프다. 어쩌면 살아있다는 느낌에 대한 집착일까. 안고의 타락론이랑 반짝이끼를 읽으며 좀 깨달은 것 같다. 나는 투쟁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2
가장 큰 고민. 요즘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다. 내 생각에는 오랫동안 좀 정체를 겪다 변화해가는 단계인데, 여전히 익숙치 않아서 느끼는 감정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뚜렷한 사람이었다. 늘 내 세계가 확실했고 그게 주류가 아닐지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스무 살 때 즈음에는 이게 좀 거칠었다. 나를 최우선으로 두고,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야. 세계의 끝이 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일을 겪으면서 좀 유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했는데 최근에는... 그 선명함이 흐려지는 것 같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내가 특이한 사람은 아닐지언정, 확고하고 선명한 사람이란 게 나의 중심이라 생각했으니까.
아마도 내가 다정을 너무 동경해서 나도 모르게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걸까. 그리고 그게 나답지 않다 생각해서 오는 괴리감. 이게 원인일 것이다. 나쁜 변화는 아닌데 아마 슬퍼서 그런 것 같다. 남을 빛낼 수 있는 사람이 멋있단 걸 알지만, 내가 제일 빛나던 때의 행복을 아니까. 빛나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니까.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3
나하면 빼놓을 수 없는 페르소나에 대한 고찰. 내 페르소나에 불만이 많아진다. 페르소나가 오히려 벽을 둘러버리는 느낌이다. 그만큼 안전하고 건강한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요즘이지만... 이 평화가 날 퇴보시키는 기분. 나의 모든 페르소나는 도전에서 생겨났고, 상처에서 발화했고, 거기서 얻은 배움으로 만개한 존재들인데... 이제는 잘 자란 이놈들이 역경이란 걸 다 막아버리는 느낌이다. 새 페르소나의 탄생이 생길 여지가 없는? 여유도 좋지만 나는 나아감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란 걸 알기에 이게 싫다. 새로운 사람을 여럿 만나고 있지만 과연 이게 도움이 될까. 그리고 x발 페르소나 이 새끼 지 주인 닮아서 몸에 안좋은 것만 골라먹으려 해. #selfhatred
4
연애 이야기 싫증난다. 그런데 사랑 이야기는 좋다. 무슨 차이냐면... 남의 연애사는 솔직히 그닥 궁금하지 않다. 전남친이 연락이 안되어서 찾아갔더니 옆에 다른 남자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정도로 도파민 터트려 줄 거 아니면 굳이. 이상형도 한 두번은 상관없음. 근데 왜 계속 물어보는 걸까. 솔직히 대부분 느낌을 받지 막 특정한 외관 묘사하기 힘들지 않나요? 나만 그런 걸수도.
여하튼 근데 사랑 이야기는 재밌다. 무슨 차이냐면 이상형이란 정보값은 궁금하지 않은데 그런 이상형이 생기게 된 계기를 듣는 건 즐겁다. 애인의 역사는 지루하지만 애인을 사귈 때 갖는 가치관은 흥미롭다. 한마디로 사람 이야기가 좋은 거다. 그 사람의 이야기가. 사랑도 결국 한 사람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할 때만 보이는 태도에서, 사랑하고 싶을 때 나오는 행동에서. 그러한 인간의 군상이 재밌는 거고 흥미로운 거다. 그래서 내가 다들 자기 블로그는 읽어달라 하면서 남의 글은 쳐읽지도 않을 때 (ㅋ) 나는 정주행하고 있는 듯. 사람을 읽어가는 기분이라. 두서 없지만 무슨 차이인지 알아줬으면 조켄네~
5
자존감이 낮아졌나?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나는 내 외모에 큰 불만 없다. 남이 뭐라해도 내 스타일에도 만족하고. 내 취향에 나름 자부심도 있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나라는 사람의 색채를 잘 모르겠다. 남들은 너무 뚜렷하다고... 그냥 님은 조예은이세요 이러는데...그게 뭔데. 나도 궁금하다. 이전에 말한 나에 대한 고찰을 갖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런 고민이 생긴 것 같다. 뭐 다행인 건 나는 그래도 지금 만들어가는 내가 좋다는 거. 타의가 아닌 자의로 다양하게 빚어가고 있다 생각해서. 내 삶이 그래도 재밌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궁금한 세계가 될 수 있다는 증거니까.
근데 최근 그 생각은 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나를 안 좋아하는 거 같다는...ㅋㅋㅋ
6
단단한 사람도 멋있지만 나는 유연한 사람을 늘 동경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기 전에는 주관이 뚜렷하고 상처받지 않는 게 제일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가장 민감하게 변화하는 시기에 이런 부분을 흡수해서 긍정적인 축이든 부정적인 축이든 자기 세계관이 뚜렷한 사람이란 말을 많이 듣는 것 같다. 하여튼 이제는 무른 사람들이 좋다. 남한테 기껍게 자신의 일부를 떼어줄 수 있는 사람. 번거로움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빛나 보인다. 그냥 착한 거랑은 다른 개념으로.
7
Q. 인간은 평생을 명확한 답 하나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우리가 의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이 확실치 않아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없다면 우리는 의심만으로 진리를 밝혀낼 수 있을까요?
A. 학우님이 제시하신 질문이 곧 저는 수많은 철학자가 살아가는 내내 직면한 장벽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에 대한 불확실성은 회의와 불안을 초래했고, 이를 해소하고자 철학적 탐구가 진행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인류사의 끝없는 의심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사 자체가 미지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과정의 연속이기에, 철학 또한 물음을 통해 죽음이나 진리와 같은 미결의 존재들의 갈피를 잡으려 투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변한다고 생각한 과학적 사실들에 대한 의심 또한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지동설이 옳은 걸 누구나 알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달랐을 겁니다. 그들한테는 태양이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우스웠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과학적인 지식조차 유동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결국 확정된 사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학우님의 말씀대로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는 그 불확실성의 인지 자체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이를 발전적인 삶이라는 해석보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집중하여 해석하는 축이긴 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의심이 왜 필요하냐에 다양한 이유를 가져다 붙일 수 있겠지만, 애초에 의심이 선택이 아닌 필연의 영역에 놓여있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심의 의의 자체를 질문하고 찾는 과정이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에 두 분의 말씀에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결국 이렇게 각자 중점을 두는 의견이 갈리는 것도 진리란 존재하지 않고, 목적성이란 건 없기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업에서 나눈 이야기 중 요즘도 종종 하는 생각이라 적어두기. 최근 내가 생각하는 철학에 대한 의미가 다 담겨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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