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from dead(still dead inside)

@joynjoyen

훌훌 털고 일어나요, 그 자식 강냉이를

b.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0.
여러 의미에서 버거운 책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라는 추상성을 과학이라는 정밀성으로 설명하려다 보니 내용을 필사하고 복기해가면서 읽으면서도 논리 구조를 정확히 파악한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힘들었다. 물론 난이도와는 별개로 흥미로운 해석들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시간은 무지라는 주장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러나 내가 잘못 이해해서 그런 것일지는 몰라도 작가의 주장 내에서도 자꾸만 모순이 발생하여서 매끄럽게 완독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래도 평소 읽지 않던 분야를 탐구할 수 있었던 기회라 좋았다.

1-1.
시간의 흐름을 통제 불가의 변인이지만, 삶은 개인이 조정할 수 있는 개체값으로 인식되기에 본 인식이 편안함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점은, 삶 또한 결국 시간의 구체적인 이름 중 하나일 뿐인데 사람들은 두 문장에 대해 전혀 다른 인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흐르는 건 시간이 아닌 삶이라는 선언은 결국 고정관념에서 이탈한 새로움보다는 동일한 문장을 다르게 듣는 사람들의 차라고 생각한다.

1-2.
미래를 향해야 한다는 뜻은 결국 과거나 현재와 같은 정지된 순간에 고립되는 현상을 경고하기 위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책에서 시간을 상호작용에 중점을 두고 해석했기에, 오로지 개인의 사유 내에서만 일어나는 역행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열보다는 작가의 다른 입장 중 무지에 대한 해석이 오히려 더 메시지 전달에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일컫는 열에 해당하는 고통은 꼭 역행의 구조에서만 등장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과 불안정성 또한 과거에 얽매인 상황과 비슷한 불안과 고통을 만들어낸다. 결국 작가가 일컫는 이 열은 비가역성보다는 불투명도에 의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거가 멀어질수록 시야가 희미해진다면, 미래는 멀어질수록 오히려 빽빽함이 눈앞을 캄캄히 가린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미래를 향해야 한다는 시제에 집중하기보단, 미지에 대한 공포를 감소시키는 게 나는 바른 생각이라고 본다.

2-1.
시간의 가치가 상승할 것이다. 사회가 조성된 이후로 모든 환경에서 차이는 결국 자연스러운 차등을 낳았다. 만약 동일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은 하루를 1년처럼 살아갈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1년을 하루밖에 못 산다면 이 격차를 규제나 경제에 적용하려는 집단은 항시 나타날 것이다.

2-2.
배경지식이 전무하기에 모르겠다. 다만 미세한 격차마저 큰 차이를 불러올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작업이나 환경에서 이용되지 않을까 싶다. 생명과 연관된 연구나 현장과 같은.

3-1.
시간이 입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나는 여전히 시간은 연속적이라고 믿는다. 시간을 상호작용이라고 규정한다면 결국 시간이 단절되는 ‘무’에 해당하는 순간은 어떠한 상호 작용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계 안에서는 그러한 상황은 발생이 불가능하다. 만약 가능하다 전제하더라도 그런 경우 무엇도 상호 하지 않는 그 여백은 어떠한 상호 작용 없이도 존재한다는 소리인데, 이는 작가가 성립 불가함을 주장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시간은 상호 작용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원자 간의 충돌이라는 입자의 특징을 가질 수는 있으나, 불연속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3-2.
세상은 상호작용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다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세상 또한 존재를 했는가 아니면 나의 탄생 이후를 세상이라 인지하고 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4-1.
과학적으로는 결국 생명 활동에 사용되었던 에너지가 세상의 다른 부분으로 치환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죽음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걸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결국 인식이 사라지는 순간 과학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결국 이는 시간의 정지라고 생각하기에 죽음을 흐름보다는 온점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 같다. 여담으로 주제 때문인지 류이치 사카모토의 에세이가 생각났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모르니 우리는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무한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극히 적은 횟수밖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4-2.
존재가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책에서 설명하듯이 영원불멸한 현상으로서 현현하지 않는다. 시간을 구성하는 것 또한 입자와 같은 하나의 존재이고, 시간에 의미와 흐름이 생기는 것 또한 존재 간의 상호 작용이다. 결국에 존재가 없으면 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5-1.
우리의 계 내에서는 결국 엔트로피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과 기억을 보존한 채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그냥 신체적 자유가 생길 정도의 어릴 적으로 돌아갈 것 같다. 이유는 많은 사람들과 비슷하게 인지 차로 미래를 위한 편안한 설계나 도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사람들이 역행을 바라는 건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현실보다 조금 더 제거된 상황에 가깝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5-2.
나는 결국 질서 자체가 인위성이라 생각하기에 동의한다. 동일 상황에서 개인 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건 사람마다 이미 다 차이를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자라온 환경이 비슷하더라도 신체적인 차이 혹은 만난 사람들과의 차이 등 미세한 상이함은 늘 존재하기에 일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와 의견을 다른 사람을 보아도 그 사람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오답은 없더라도 매력적이지 않은 답변은 존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6-1.
나는 예측 불능이 삶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미정의 상황에 갇히면 인간 또한 미정의 존재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 환경에는 불안이나 공포와 같은 감정도 분명 섞여 있겠지만 그러한 극단성에서 발현되는 선택들은 긍정적인 방면이든 부정적인 방면이든 일반 상황에서는 보기 힘든 일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불안정성이 주는 즐거움을 때때로 즐기긴 하지만 이는 내가 현재 속한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확정성이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사치라는 생각은 한다.

6-2.
나는 랭보의 말처럼 나 또한 한 명의 타자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와의 대화는 결국 내가 경험한 모든 세상과의 대화와도 같다. 사람은 자아는 본인이라 쉬이 착각하면서 세상은 엄격하게 외부로 구분 짓곤 한다. 나는 두 개념을 유리된 상태로 간주하진 않는다.

7-1.
삶에 있어 능동성을 추구하는 축에 가깝다. 지금까지의 일대기를 봐도 보편적인 환경에서의 선택과는 다른 경험을 여럿 해보았고, 감정의 관찰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도 중간에 있었다. 나에게 삶의 의미란 결국 흔히 능동성이라 일컫는 ‘선택의 자유로움’에서 오는 듯싶다. 이렇게 해석하면 삶은 변화가 가능한 존재라는 가변성과 내가 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통제 가능성이 동시에 충족되기에 나름 합리적인 의미가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다.

7-2.
나 또한 이 의문은 몇 년째 답을 못 내리고 있다. 의식 있는 생명체의 이전에도 분명 세상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세상에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면 쉽사리 답하지 못하겠다. 그 세상이 선행했기에 의식과 존재가 설령 탄생했다 하더라도, 결국 이는 존재의 탄생에서 의미를 설명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현실과 의의 사이서 일어나는 불일치성이 항상 고민을 만들어낸다. 세상을 결국 총체적인 한 개체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주관적인 사건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갈라진다고 생각한다. 근래에는 의식 속에서 결국 하나의 세상이 탄생한다고 생각하는 축이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한 의문은 있다.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살 - 에두아르 르베  (0) 2024.09.19
b.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0) 2024.09.15
b. 광기와 천재  (0) 2024.08.22
P.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들을  (0) 2024.08.16
B.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0) 2024.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