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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서 읽은 책은 오랜만이었다. 인문 철학 쪽은 확실히 좀 가볍게 묵독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는 듯 싶다.
0.
염세와 허무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진정한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란 점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최근의 내가 삶을 진정 사랑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자문할 수 있는 시간이라 좋았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에 대해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기에 필소 동아리원들의 다채로운 생각이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특히 증오에 대한 해석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떤 장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는지도 궁금하다.
1-1.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랑의 방식은 존중이다. 개인적인 거리를 유지해 주는 것 또한 존중의 한 방법이고, 나를 위해 본인이 힘듦을 감수하는 것 또한 존중의 방식이라고 본다. 다르게 해석하면 ‘강요하지 않는 것’과도 유사하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랑, 개중에서도 연인 간의 사랑이라 하면 통상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락 횟수, 거리감, 표현법 등이 일반화 되어있는 것 같다. 특히나 사랑할 때 나보다 연인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나는 연인이 늘 자신이 우선이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행복해야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1-2.
잠재된 폭력의 가장 무서운 점은 행사자도, 피해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가정에서 형성되는 폭력은 일종의 ‘가내 규칙’이라는 말로 포장되기 쉽다. 부모들은 아이의 필연적인 의존과 힘의 불균형을 응용한 강압성을 때로 교육과 규칙의 일부로 착각하며 이를 ‘사랑’이라 표현한다. 이러한 태도는 일시적인 순응을 일궈낼 수는 있어도 결국 아이가 큰 이후에는 폭력으로의 맞대응 혹은 회피와 같이 사랑과는 먼 결괏값을 낸다.
2-1.
공개적 권위를 택하는 것이 옳다 생각한다. 우리가 직접적인 표명에서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거절의 표명을 익숙지 않게 만드는 환경 때문이다. 배려의 화법은 마치 나 또한 상대의 부탁을 수락해야만 할 것 같다는 착각을 쉽게 낳곤 한다. 거절 또한 하나의 선택임에 익숙해질 수 있어야 하나, 우회적인 화법은 부담 혹은 오해를 증폭시키기 쉽다. 이러한 이유로 공개적 권위에 부담을 느끼는 우리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에서 3의 표현은 의미상 공손성의 차이가 있지만 1과 2는 언어적 공손성의 차이 같다. 그렇기 때문에 3처럼 간접적인 권위 행사는 문제가 될 수 있지만, 2는 ‘직간접 문제’보다는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회의 언어적 약속’ 준수에 해당한다. 따라서 2를 따르는 것이 옳은 이유는 프롬의 직접성 문제보다는 언어상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2-2.
지문에서 이타심이 문제 되는 이유는 학습된 강제성에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나는 이 학습을 완전하게 부정적으로만 간주하지는 않는다. 자신을 포기하는 이타심은 문제고 부모의 강제성은 자기 회피성으로 연결되기 쉽다. 그러나 이타심을 강제적으로라도 교육받지 않은 아이들 또한 팽배한 이기주의의 문제에 직면하기 쉽다. 극단적으로 비교하면 나는 적어도 강박적 이타심은 행사 과정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챙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잉 배려 행위를 통해서라도 자기 가치를 인지하고, 그 과정에서 누적된 스트레스가 있다면 이것이 그릇된 행위임을 인지하고 변화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한 이기주의는 문제 상황이 인지 불가한 왜곡에 빠진다. 주변에서 말해주어도 결국 그들한테 이타심=손해라는 일차원적 공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긍정적인 케이스는 긍정적인 이타심의 발현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타심에 대한 교육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하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의 강요로 이어지면 안 된다. 내가 부모였다면, 이타심은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한테 나눠주는 마음, 다른 사람이 나를 배려해 준 것처럼 상대를 생각해 주는 행위라고 설명할 것 같다.
3-1.
불가능하다. 나는 삶은 투영의 연속이라고 본다. 우리가 무언가에 관심을 두는 행위는 그 사람을 단순히 인지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해는 우리가 여태껏 삶을 살면서 세워진 가치관과 인식을 기반으로 상대를 독해함을 의미한다. 결국 왜곡은 필연적이나, 중요한 것은 이후의 대처라고 생각한다. 타자와 마주할 때 결국 왜곡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항시 인지하고 있는 것, 그렇기에 섣불리 내가 본 것에 대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 타인의 삶을 향유할 때는 이 두 태도가 필요하다. 프롬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로 줄인다’라는 표현 또한 의미상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3-2.
객관성은 주관성의 반대라는 점에서 타인의 목소리를 많이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객관성은 개인의 시선을 제외한 수많은 외부의 시선들의 합산이라는 점에서 다수결과 유사하다. 즉, 다수결이 항상 선은 아닌 것처럼 객관적인 시각이 늘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나의 생각이다. 객관적인 시선은 특수성을 배제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으나, 때로는 왜곡된 세상 또한 필요할 때가 존재한다.
4-1.
동의한다. 이러한 삶에 대한 집착은 결국 필자가 말한 탐욕과 결이 같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인간은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소유한 대상보다 더 강하게 느끼는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삶이 즐거운 사람들에 비해 이러한 결핍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삶’이란 대상에 더 크게 의미 부여를 한다. 그들한테 삶은 특별히 도달해야 하는 이상향이기 때문에 고정적인 거대한 존재이다.
그러나, 삶을 즐기는 사람들의 특징은 삶이란 결국 가변적인 대상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주류라 생각하는 길에서 이탈하여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삶이란 완전히 통제 불가한 대상이며,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선택으로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은 개인의 마음가짐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가난해도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고, 집단에서 떨어져 있어도 즐거움을 느끼는 이들 또한 존재한다. 사회 구조가 이러한 마음가짐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으나, 결국 근본적인 변화의 힘은 개인한테 자리하고 있다.
4-2.
죽음의 두려움은 늘 미지에 대한 공포에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 또한 결국 완전한 평안으로 죽음을 대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들 타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는 이유 또한 결국 ‘죽음’은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성 자체를 따질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만, 자살과 안락사가 당위적 선택에서 벗어난 존재인가 묻는다면 본인 또한 마냥 긍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는 죽음을 선택하려는 자세 자체보다는, 선택을 두고 얽힌 주변 환경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본인 또한 아직 죽음에 관해 완전한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섣불리 답을 주장하기 어려운 논제라고 생각한다.
5-1.
나는 학습된 무기력에는 언어보다는 행동과 경험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한테 상담에서 가장 많이 권유하는 것이 ‘쉬운 장애물을 극복하는 경험’을 자주 하는 것이다. 학습된 실패는 결국 무능의 세뇌로 이어진다. 반대로,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반복적인 성공에 노출되면 사람은 효능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한테 러닝과 같은 운동을 자주 권유하는 바이다. 회복탄력성은 결국 극복의 경험에서 나온다.
5-2.
듀드주의 또한 현대인이 삶을 즐겁게 향유할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추구하고 싶지 않은 사고관이다. 내게 듀드주의는 두려움을 이유로 충격을 완화하려 내세우는 방어기제로 인식된다. 회복탄력성이 없는 사람한테는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나는 삶은 쉼 없이 깨지고 아파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생긴다고 믿는다. 듀드주의처럼 그 크기를 약화하는 게 당장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나는 언젠가 다가올 더 큰 문제를 직면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슬픔과 허무 또한 경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듀드주의로 살아가는 이들 또한 자신한테 맞는 삶을 현명하게 맞춰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듀드주의보다는 끊임없는 교류와 실망을 겪고 사는 이들과 더 교류하고 싶다. 내 가치관이 투영된 세상에서는 이들이 더 매력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6-1.
생존 이상의 목적을 가진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주체성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극복하는 방법은 선택할 수 있으나 결국 생존이라는 외부적인 위협에 의해 강제되고 축소된 선택지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생존이 보장된 후로부터는 자신만의 삶을 꾸릴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해진다. 생존 외의 생활을 향유하느냐, 생존의 질을 높이느냐는 둥 선택할 수 있는 영역들이 다양해지고, 이는 다채로운 삶을 만드는 기틀이 된다.
6-2.
기본소득제도는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도의 목적은 ‘선택지를 늘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지 ‘선택이 필요 없는 삶’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 정책은 분명 청년들을 도와주는 면도 있으나, 최소에 안주하게 만드는 경향도 있다. 여기에서 안주는 단순히 경쟁에서 벗어난 비주류를 선택했다는 것이 아닌 과한 의존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제도 도입 시 수혜 지속성에 대한 규정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소득과 유사한 LH 행복주택 등의 제도를 보아도 이를 악용해 칩거하는 고립 청년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 규제는 필연적이다.
7-1.
인간이 소비를 대체 행위로 지속하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한다. 본질적인 문제 회피 외에도 물건이나 대상을 소비할 때 단순히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을 넘어서 이를 소비함으로 인해 따라오는 결과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적 소비의 예로는 요즘 많이 보이는 전시회 관람에 있어 미술품의 향유보다 이를 SNS에 게시하는 행위를 통해 지적 이미지와 문화적 아비투스를 높이려는 욕망을 간접적으로 추구하는 행위가 있다. 여기서 그들이 만족시키고자 하는 대상은 온전한 주체가 아닌 외부의 대상이 된다. 결국 본인의 만족은 비교적 인지하기 쉽지만, 타자의 경우 이를 측정할 수 없으니, 불안감과 공허가 비교와 과시 등의 행위를 통해 표출되는 것이다.
7-2.
소비의 가장 큰 위험성은 기준 축 또한 향유 수준에 맞추어 이동한다는 것이다. 즉, 과시적 소비가 일시적인 행위가 아닌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문제로 자리할 확률이 커지는 것이다. 단순히 소비하는 습관뿐만 아니라, 저축하는 습관 또한 미리 길러두지 않으면 ‘모자라게 사는 삶’ 자체에 대한 인내가 사라질 수 있다. 금전적 인내 하나 못 하는 사람이 다른 문제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8-1.
완전한 자유는 불가능하나 이를 충분히 축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강제성을 유발하는 대상을 최대한 충족하는 것이 그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자유에 집착하는 이유 또한 강제성의 핵심 주축이 자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대상이 명성일 수도 있고, 흥미충족성일 수도 있다. 이처럼 자신이 삶에 있어 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최대한 충족할수록 무력감은 완화된다.
8-2.
불안을 탈피하는 방법에 있어 정론은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불안을 회피하려 일을 하는 것은 오히려 번아웃 현상과 같은 부작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긍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오히려 부정적 감정이 일과 합선되어서 일 자체를 혐오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나는 불안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을 환기할 배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 배출 방식과 환경은 직접적인 문제와는 무관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나한테 있어 ‘완화’의 역할을 해주는 것은 여행이고, ‘극복’의 역할을 해주는 것은 일과 무관한 분야에서 공부이다. 특히나 극복의 과정에 있어서는 결국 어느 정도의 불안이 작용한다. 즉, 불안의 완벽한 제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불안에 잠식당하는 것보다는, 일이든 혹은 다른 방법이든 다양한 행위를 통해 이를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착오와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 결국 불안한테 주체성을 뺏기지 않고 현명하게 이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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