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from dead(still dead inside)

@joynjoyen

훌훌 털고 일어나요, 그 자식 강냉이를

B. 앵무새 죽이기

소요 시간 : 3~4h 사이?

 

후기 및 잡담

필로소피아 첫 토론이었다. 책 자체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나름의 의의를 갖는 서적이라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사회고발적 성격의 서적은 이렇게 읽고 난 다음에 감명 깊거나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류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좋은 기억보다 끔찍하거나 불쾌함을 더욱 오래 간직한다 생각해서... 뭐 그런데 이건 개인적인 선호도니까. 아름다운 이야기었다. 그저 취향이 아닐 뿐이지.

 

첫 토론은 좀 조용했다. 기용 오빠랑은 그래도 MT때 말을 놓아서 편했는데 나머지 분들이 다들 조용조용한 성격이고, 아직 처음이라 거기에 분위기가 맞춰진 것 같다. 나쁘다는 건 아니었고 다른 조들이랑 좀 상이했던 거 같아서. 토론은 나쁘지 않았다. 내가 놓친 부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많이 해주셨고... 개인적으로는 예진 님이랑 현우 님이 제일 인상깊었다.

 

예진님은 전반적으로 이상주의에 가치관 자체도 정의와 올곧음에 많이 비중을 두시는 것 같아서 멋졌다. 아무래도 나는 완벽한 이상론과는 먼 사람이라 그런지 애티커스라던지 예진님처럼 '보편적인 선함'을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분을 보면 멋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만큼 반박하고 싶은 점도 많지만. 현우 님은 되게 정돈된 의견을 많이 냈는데 토론 주제에 대한 답변보다 그 너머 생각할거리를 많이 던져주셔서 좋았다. 비슷한 의견이 많아서 납득이 갔던 것 같기도 하고... 적다보니 태수님도 기억에 남는다. 현실주의가 많이 강하신 분이었어서 전반적인 가치관이 맞는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토론거리도 풍요로워지고 아무래도 논쟁거리도 많았던 것 같다. 다만 약간 태수님이 제안하시는 의견에서 다대일 구도가 많이 나와서... 너무 의견 강요로 굳어지는 분위기처럼 느끼셨던 건 아니었을지 문득 생각이 들긴 했다.

 

첫 토론은 그래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아무래도 이런 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집단이 근래 많은 것도 아니고, 토론 동아리에 그래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부터다들 생각이 확고하시고 가치관들이 명확하신 분들이라 생각해서 좋았다. 나는 내 의견과 정반대에 있더라도 확신을 가지는 사람이 좋다. 물론 이는 서로 대화와 들으려는 태도가 된다는 전제에서. 그런 면을 충족시켜주는 분들을 만나서 즐겁게 대화한 것 같다. 

 

일 때문에 바빠서... 원래 다음 토론은 빠져야하려나 싶었는데 선정 도서가 본래 읽고 싶었던 거라 그냥 내 스케쥴을 짬내서 몰아붙이기로 했다. 보내드려야하는 마감일이 좀 빠듯하긴 한데 뭐 평일에 갈아서 일하면 시간 나겠지. 다음 후기는 이렇게 감상평보다는 좀 더 토론 내용도 정리해두고.... 생각거리도 정리하며 적기로. 무튼 즐거웠다~  

 

 

하단은 발제의 답변


0721 앵무새 죽이기 발제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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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당시 사회의 문제상을 특정한 사건이 아닌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소설이라 생각했다. 차별이 문제라는 명제는 당연하기에 모두가 염두에 두지만 현실이 차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하기 때문이다.

 

1-1.

네이선의 행위는 보호라고 생각한다. 네이선은 옹이구멍을 막은 이유를 나무가 죽어가고 있다며 병에 걸리면 이를 시멘트로 막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나무는 부에 대한 은유로도 해석 가능하다. 네이선이 생각하기에는 아이들과 부의 접촉을 막아주는 것이 보호이자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옳은 치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보호'가 과연 미성숙한 아이들한테 상처받을 부를 걱정해서인지 혹은 자신이 생각했을 때 비정상에 속하는 부한테 영향받을 아이들을 위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네이선이 포용적인 인물로는 등장하지 않았기에, 그가 호소하는 보호는 어쩌면 타인을 보호하는 행위를 빙자한 자기 보호에 가깝다고 해석한다. 남들과는 다른 부가 노출되는 일과 그로 인한 타인들의 잣대를 본인이 견뎌낼 자신이 없기에 보호를 빙자해 구멍을 막았다고 생각한다. 애티커스가 나무를 보고 건강하다고 말한 평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이 보호가 오직 네이선의 시선에 맞추어 이루어진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옹이구멍의 차단은 부와 아이들한테는 치료가 아닌 단절로 해석된다. 왜곡된 언어 없이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옹이구멍은 아이들이 부를 이해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1-2.

젬과 스카웃이 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소통이 필요했고, 길지만 그 과정에서 기성세대들의 의견에 대한 편견 또한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에 앞서 결국 이해와 극복의 단계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과 대비되는 어른들의 가장 큰 태도는 편견보다는 무관심이라 생각한다. 부의 소문을 들은 아이들은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직접 두드린다. 그러나 어른들은 부의 소문을 믿거나 혹은 그것만이 '부가 사는 방식'이라며 그에 대한 차단을 배려라고 일컫는다. 결국 소통 또한 각 대상이 서로한테 관심이 있을 때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에서 등장한 문해력과 같은 다수 세대 간의 갈등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령, 기성세대의 경우 낮은 독서율과 MZ라는 집단성 일반화로 다음 세대의 특성을 이해하려는 관심보다는 판단과 지적에 치우친 행보를 보인다. 역으로 현세대의 경우 기성세대의 말들을 차단하려는 개인주의적 모습이 강조되며 결국 상호 무관심을 보인다.

 

2-1.

소설에서 앵무새는 무고하게 지탄받는 약자들을 상징한다. 방울새(Finch)의 성을 가진 이들 또한 흑인을 위해 변호하고, 어른들의 말에 반문하는 등 주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처럼 소설에서 인간의 - 여기서는 흔히 말하는 기성세대 혹은 상징적 의미의 어른들 - 세속적인 면모와 편견 어린 시선을 강조할 때마다 새의 무고함과 무력함이 함께 부상한다. 본문에서 드러난 새의 특징 또한 다른 인간과의 차별점을 보여준다. '비가 오면 어디로 날아가야 할지 아는' 행위는 위기 상황에서도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각인하고 있는 새의 모습을 보여준다. 알면서도 비겁한 선택의 연속을 내릴 수밖에 없는 마을의 사람들과 그조차도 인식지 못한 부끄러운 이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 새는 소설 속 인간들에서 벗어난 정의/진실 등을 보여준다.

 

2-2.

스카웃이 아버지한테서 발견한 용기는 바로 포용력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인 듀보스 할머니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 듀보스 할머니한테 고운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도 그녀를 존중하는 포용력. 자신과 타인의 일체를 강요하지 않고 다름을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 또한 상이함을 존중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포용 또한 용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용기란 '관철'에 더 가깝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행위나 결정에 믿고 책임을 지는 모습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애티거스의 포용력 또한 듀보스 할머니한테서 지탄받는 와중에도 꺾이지 않는 모습이기에 일종의 관철이 맞다. 그러나 꼭 성인군자 같은 모습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아니라는 행위에 맞다고 발언하는 모습, 타자의 시선이나 명예 등 목적이 순수하지 않아도 뱉은 행동을 실천하는 모습. 이런 것들 또한 일종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3-1 & 3-2.

애티커스의 결정은 늘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속 변화들은 단숨에 일어난 일들보다 누적되어 뒤바뀐 것들이 더 많기에 필요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개인이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아야 옳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현실에 살기에 항상 이상적인 선택만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평가받기는 어렵다. 모든 변화가 일어난 현재의 시점에서 그의 결단은 숭고하다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모두한테 옳다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당위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이상에 가까운 것 같다. 옳음을 위해 주변인들의 희생을 감수하는 게 당연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3-3.

애티거스의 교육관은 전반적으로 훌륭한 편이다. 배려와 이해는 선천적으로 발생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관찰이든 혹은 교육이든 습득이 이루어져야 하므로 핀치의 교육은 필요하다. 그 경도가 부모에 따라서 과해질 수 있으나, 결국 그에 대한 판단과 납득 또한 아이의 몫이다. 스카웃 또한 아버지의 말을 따르면서도 제가 느끼기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은 반박을 택하든 혹은 침묵을 택하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핀치가 그 교육 속에서 스카웃의 입장을 배격하지 않기에 충분히 부모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핀치가 교육에 앞서 아이들한테 공감과 이해를 먼저 선행했기에 가능한 행위다. 경중으로만 따지면 부모는 교육 이전에 자식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4-1.

메이엘라와 톰의 입장에서는 교류 자체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백인의 여성과 흑인이라는 문제보다는 유얼 집안이라는 환경 자체가 원인이다. 캘퍼니아 아주머니 또한 유얼 집안의 고용인으로 일했다면 톰과 같은 대우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핀치 가에서 캘퍼니아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란 지위에 따른 차이는 있어도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이성 간의 문제를 배제해도 메이엘라의 '깜둥이' 발언은 톰이 그 집에서 결코 인격적으로 동등해질 수 없음을 제시한다.

 

4-2.

톰과 유얼로 비교하자면 유얼이 더 약자겠지만, 이들의 상징성에 입각하면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보다 약자였다고 생각한다. 유얼 개인은 가정 폭력의 피해자이며 당대 시대상 인권적으로도 낮은 위치에 처해 있다. 그러나, 백인 여성이란 상징만을 두고 본다면 적어도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위치이다. 톰은 물리적인 힘이나 남자라는 태생적인 부분에서는 강자에 속한다. 하나, 흑인이라는 인종을 애초에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류는 무용해진다. 실제 유얼이 덮친 상황에서 톰이 조건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면서도 택할 수 있던 선택지가 도망밖에 없었다는 점이 당시 흑인과 백인의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4-3.

스카웃과 비슷한 나잇대였다면 나는 거절했을 것이다. 사회의 민낯에 이르게 노출되는 것이 마냥 긍정적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성, 잔혹성, 불공정성, 추악함. 모두 언젠가는 알아야하는 일이 맞지만, 스카웃의 나잇대부터 직접적인 노출을 겪는 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격한 반발감을 심어주거나 심리적인 충격으로 이어지는 등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4-4.

법정 판결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논리보다는 인종과 사회적 압박이 앞섰기 때문에 작중에서도 유죄가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메이엘라 유얼이 톰한테 우호적이고 아버지한테 비관적이었을 경우에는 승소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메이엘라의 증언이나 기정 폭력에 경중을 둔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경우 '피해자의 증언'으로 가치를 가지던 메이알라의 발언은 흑인과 연애 감정을 품었다는 이유 하나로 '묵살해도 될 의견'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결국 톰과 메이엘라는 무시된 채 유얼과 핀치 간의 다툼에서 핀치가 우위를 점하기에 일어날 수 있는 다소 씁쓸한 가능성이다.

 

5-1.

자국의 국민참여재판제도는 의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작중에서 배심원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성 외의 조건들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문제시 삼는다면 변호인을 비롯한 검사, 판사 등의 인물들 또한 자유롭다고 판단하긴 어렵다. 아울러 법정과 법을 구축한 것이 작중에서 비판받은 백인 남성과 같은 기득권층임을 고려해야 한다. 현 제도는 평결이 기속되지 않는 권고이기에 법률이 간과하기 쉬운 특수성을 지적하면서도 의결에 대한 직접적인 오판을 방지해준다. 실효적인 부분에서는 물론 의문이 생길 수 있으나, 추가적인 시선의 개입이라는 개념으로 충분히 의의를 갖는다고 본다.

5-2.

()에서 정의내리는 민주주의에 미국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 정의에 완벽하게 준하는 나라는 영원토록 존재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평등한 세상이란 존재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특권을 주지 않는 평등이란 민주주의에 결국 위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등을 위치값이라 생각하면 만인이 조건이 똑같은 상황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자연과 인공 사회 모두 불평등을 기본값으로 두기 때문에 어폐가 생긴다. 이러한 조건을 최소화하고 ()처럼 평등으로 나아가는 행위 또한 분명 필요하나, '누구에게도 특권을 주지 않는' 방향과는 상이하다. 인종과 같은 태생적 특권이 사회에 존재하기에 이를 완화시킬 제도가 필요한 것이고, 평등이란 상태보다는 본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6-1.

()를 고려했을 때 앵무새 죽이기는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당연시하면 안되는 바를 의미한다. 톰과 같이 그저 남을 돕고자 했던 흑인, 부 래들리처럼 자신만의 생활 방식이 있는 사회 밖 이방인. 그리고 핀치 가족처럼 주류 사회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 이렇듯 남한테 피해주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앵무새(mockingbird)'를 대표하는 속성인 흉내 또한 별도의 상징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앵무새는 약자 외에 사회속 자연스레 모방을 습득한 사람들을 표방한다. 어른들을 따라 부의 소문을 흉내내고 부풀리던 아이들, 자신의 세월 속 들은 목소리들에 의해 편견으로 횝싸인 듀포드 부인, 법정에 참여한 군중들. 모두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만 타인의 의견에 영향을 받은 - 마치 흉내와도 같은- 행위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오판을 완전히 비판하기 어렵다. , 단순한 약자와 무고함 외에도 사회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소시민이나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도 말한다고 해석 가능하다고 본다.

 

6-2.

앵무새 죽이기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환경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차별은 끊임없이 우리한테 가시화되지만 가정은 내밀하고 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무시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훈육할 때 일어나는 흔한 문제인 강제성과 의식주를 이용한 권위적 행위등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한다. 인권 문제와 같이 목소리를 당당하게 높일 수 있는 문제들과 달리 가족 문제로 흔히 힘들어하는 주변인들 혹은 다른 피해자들이 침묵하는 비율이 더 높다는 점에서 진정한 앵무새 죽이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6-3.

길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지하철 노약자석 혹은 임산부석에 앉는 사람들한테는 배려심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편견은 담장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걸 막아줄 수 있지만 동시에 나를 고립시키기도 한다. 최대한 다양한 세상을 보고 싶기에 편견을 많이 가지지 않으려하지만, 내가 거부감이 드는 것들을 밀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는 행위들이 있는 것 같다.

 

6-4.

유년기의 화자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아직 모자라기에 오히려 이를 더욱 가감 없이 설명하는 화자로 활용된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스카웃의 태도 또한 아직 어른과 사회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불편함에 피했을 부분들까지 내밀하게 묘사하고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앵무새가 단순히 인종차별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제시한다. 차별은 노출된 장소 외의 사각지대에서도 일어난다. 스카웃이 주변 어른들한테 숙녀가 되어야한다고 받던 압박, 비슷한 나이대인 젬한테도 계집같다며 무시당하던 시간들. 스카웃의 이러한 탄압 또한 작가가 비춘 또다른 앵무새 죽이기에 해당한다. 약자가 바라보는 세상과 강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차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는 피해를 받은 약자의 시선에서 말하는 것이 정당하고, 그에 해당하는 속성이 가장 많은 게 스카웃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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