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0.
발제가 이루어졌던 인문/철학 중 쉬운 편에 속했던 것 같다. 다만 다른 저서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독서 여부에 따라 챕터간 이해하거나 생각해 보는 깊이 차이가 존재했던 게 아쉬웠다. 개인적으로는 <구토> 장에서 실존과 본질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다른 사람들은 어떤 챕터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이유는 무엇인지도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1-1.
양자 간의 고민은 꼭 거창하지 않더라도 매일 삶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돈을 조금 더 내서 원하는 메뉴를 마실지 고민하는 부분에도 이성, 감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충동에 대한 해소는 어느 쪽을 택하든 감성과 완전히 분리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이성적 판단이라 일컫는 선택들 또한 나는 결국 인간의 감정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이성이라 일컫는 선택들은 대게 차후 혹은 더 커다란 욕망이란 감성적 보상을 위해 유보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갈등의 상황에서 나는 선택의 만족도를 비교해 보고 유동적으로 택하는 것 같다.

1-2.
우선 나는 종교의 초월적 구원이 완전히 세속과 분리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구원 모두 나는 현대 사회에서 버팀목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자세한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명예와 금전과 같은 물질적인 구원도, 세속에서 탄생한 비관적인 시각이란 구원도, 종교에서 탄생한 믿음과 같은 구원도 결국 다 인간이 견디기 힘든 고난을 버틸 수 있게 하는 명분에 불과하다. 자신의 필요와 가치관에 따라 형태를 달리할 뿐이고, 꼭 두 구원을 조화롭게 긍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될 때는 구원을 모두한테 동일하게 작용하는 절댓값으로 믿거나 (ex. 종교 강요, 이성 혹은 물질만능주의), 자신의 가치관 충돌로 일어나는 구원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을 타인한테 투영 (ex. 본인의 세속 욕망을 인정하지 못하고 세속 욕망을 추구하는 타인을 비판하는 행위) 할 때라고 생각한다.

2-1.
경험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둠이 나는 식물에 이는 비바람과 같다고 생각한다. 비바람 한 번 맞지 않고 자란 식물은 없다. 마찬가지로 유복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일지라도 나름의 어둠을 겪을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억센 환경에서 끝내 꽃피운 줄기와 가녀린 물줄기만을 맞고 자란 식물의 강도가 같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만큼 예외적인 경우들도 존재할 것이다. 비바람에서는 꽃을 피우는 것 자체가 힘들 수도 있고, 온갖 영양분을 인공적으로 공급받고 자라면 더욱 단단한 줄기를 지닐 수도 있다. 즉, 이러한 어둠은 성장에 한쪽으로만 그리고 늘 같은 결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어둠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게 매우 작은 어둠일지라도 성장은 성장인 것이다. 성장 자체를 우리가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어둠에서 가치를 직접 발견하는 것을 '진정한 성장'이라 통상적으로 일컫는 것은 단순히 줄기가 자라는 것과 비바람을 견디며 견고해진 것의 가치를 우리가 보편적으로 다르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성장은 여전히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직면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바른 점이든, 추한 점이든 왜곡 없이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기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곡이 들어가는 순간 성장이 아닌 퇴보, 회피, 자만 등으로 나아가기 쉬운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2-2.
관계는 비 영속하나, 타자로 환원되어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물을 얼리고 다시 녹여서 물이 될 동안 변화는 '물'과 '얼음'이란 대상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같이 관계에서도 변화의 과정에서 산출되는 내용물들이 있다. 그렇기에,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타인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 영속성과 무의미함은 다르다.

3-1.
우선, (가)와 (나)의 표현이 우선 큰 차이를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것이야말로 (가)가 일컫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좇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그래도 두 문장을 비교하자면 불완전함 자체를 포용하는 것이 사랑인지,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서로를 위해 불완전을 탈피하려 노력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비교하는 질문 같기는 하다.
나는 (가)의 표현인 불완전의 포용이 더 와닿는 것 같다.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모든 형태의 사랑은 크든 작든 쓸쓸해지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게 이 지점은 노력으로 변화하는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위해 아무리 배려해도 쓸쓸함은 늘 존재한다. 그걸 상대의 탓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분으로 인정하는 데에서 사랑의 무게와 포용력이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3-2.
어떠한 사랑이든 조건이 달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인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하나의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고, 그 환경은 조건으로 발생한다. 정말 사랑이 아무 데에서나 무조건 일어나는 작용이었다면 애초에 이러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에서 이러한 조건적 사랑의 문제가 주목받는 이유는 물질/외형적 조건만을 앞세우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풍조가 짙어졌기 때문이다. 조건은 꼭 물질적이거나 외형적인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다수의 사람과 다른 '나의 조건'을 택한 사람은 손가락질받곤 하는 게 문제 아닐까?
특히 현대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름의 불완전한 환경을 경험한 사람들이, 완전한 준비가 되기 이전까지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소 안타까운 지점이, 3-1처럼 완전하게 피어나는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1.
양쪽 다 필요하겠지만, 현대에서 중요한 건 오히려 (가)라고 생각한다. 이제 힘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더 많아진 건 맞다. 그러나 그만큼 많아진 것이 자신의 선택을 너무 편리하게 대중이나 타인한테 양도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가장 일상에서는 GPT로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무언가의 기준점 없이 '옳다'라고 일컬어지는 의견에 편승하는 것까지 있다. 설령 틀린 길일지라도 자신의 선택이 있어야 사람은 책임을 지는 법을, 선택에 무게가 따른다는 걸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4-2.
후자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꼭 권태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삶의 의미가 전사된 존재 가능성에만 존재하는가? 내가 뷔페에서 한정된 음식을 골라먹는다고, 음식의 총합이 내가 되지 않는 것처럼 구태여 나를 미래의 가능성만으로 정의하고 갇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5-1.
믿음같다. 삶에 있어 내가 결정을 내리고, 내가 택한 것이라는 믿음을 유지하는 데에서 버티는 기력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후회도 깊고, 책임도 짙을 지언정 선택할 수 있는 삶인 자유를 가장 중요시 여긴다. 하지만 진실은 시시포스처럼 무의미에 귀속된 착각일지라도, 내가 그걸 믿고 나아간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종교적 믿음에 '진실'의 여부가 크게 관련이 없는 것처럼, '부조리' 또한 자유라는 믿음 아래에서는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5-2.
크게 체감한다. 재밌는 점은, 대학가와 같이 얼굴을 드러내는 곳은 정치적이기 어려워지는 반면 얼굴이 들어나지 않는 인터넷과 같은 장소는 오히려 비정치적인 곳들마저 정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정치 발언을 금기시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이 있고, 가치관이 존재한다. 정치는 이와 매우 밀접해 있다. 이를 표출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표출하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니 사람들은 '안전한' 장소라 여겨지는 익명의 장소에 이를 쏟아내는 것이다. 문제는 얼굴을 드러내던 이전의 대학가에서는 최소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내걸고 할 수 있는 이야기나 건설적인 토론이 가능했던 반면, 모든게 익명으로 보호받는 사이버에서는 원초적인 분노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1.
불관용의 배제는 필요하며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관용으로 포용할 수 없는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틀렸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대상을 내가 이루는 사회(=관계)에서는 배제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불관용으로 대하는 사람을 내가 절대적 오답이라고 할 권리는 없겠지만, 결국 관용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자연스레 추방을 당할 것이다.
+Q ) 스스로와 충돌하는 부분인데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불관용의 자세에 가까운 자들인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성으로 이들을 수용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미 불관용한테 관용을 베푸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아닐까?

6-2.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행복이 불확실성과 미지가 존재할 때 탄생한다고 믿는다.

7-1.
나는 기억의 현재의 나를 조성하는 데에 영향을 많이 끼친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순간들 때문에, 커다란 목표가 바뀌기도 하고 조그마한 생각들이 나중에 얽혀서 하나의 서사를 만들기도 한다. 좋지 않은 기억들 또한 해를 지나면서 대하는 감정이 바뀌는 걸 보며, 나의 가치관이나 생각을 돌아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기억을 어떠한 고정형으로 붙잡고 싶기보다는, 잊히지 않을 정도로만 붙잡고 있고 싶다. 아무래도 기억은 한계가 있기에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가도, 전시를 봐도 매번 블로그나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다시 볼 때마다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그때의 즐거움을 회상하며 목표를 얻기도 한다.

7-2.
점점 시간이 빨리 간다는 걸 체감 중이라서 그런가, 시간이 귀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렇기에,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큰 의미를 구성하지 않더라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음 좋겠다. 최근에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부러 수업도 고생해도 많이 배울 수 있는 걸 택하고, 무리해서라도 가능할 때 여러 곳을 돌아다니려고 하는 것 같다.
재구성된 기억 속에서 뚜렷히 찾고자 하는 나의 모습은 없다. 다만 어느 시간대이든 똑같은 모습으로 고여있기보다는, 항상 변화하는 형태의 나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